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빅토리아 공녀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[[프란츠 폰 작센코부르크잘펠트|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작 프란츠]]와 로이스에베르스도르프의 아우구스테 여백작의 3남 4녀 중 4녀로 태어났다. 오빠 [[에른스트 1세]]는 사위 [[앨버트 공]]의 아버지이고, 남동생 [[레오폴드 1세]]는 시조카 [[샬럿 어거스타]] 공주의 남편이자 [[벨기에]]의 초대 국왕이다. 1803년 이모부인[* 에미히 카를의 전처 헨리에테가 빅토리아의 이모이다. 전처 소생의 외아들 프리드리히는 요절했기에, 라이닝겐 후작 자리는 빅토리아 소생의 아들인 카를이 이어받있다.] 제 2대 라이닝겐 후작 에미히 카를과 결혼하여 1남 1녀를 낳는다. 1814년 남편이 사망한 후 어린 아들을 대신하여 섭정했다. 4년 뒤인 1818년 [[조지 3세]]의 4남 [[에드워드 어거스터스|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왕자]]와 재혼한다. 결혼 직후 가진 아이가 바로 [[빅토리아 여왕]]인데, 당시 왕위를 계승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 왕자의 형 [[조지 4세]], [[윌리엄 4세]]의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차기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. 하지만 빅토리아 공주를 낳은 이후 남편 에드워드 왕자는 채 1년이 되기도 전에 사망한다. [[영국]]에서의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던 빅토리아는 남편의 시종인 [[https://en.wikipedia.org/wiki/John_Conroy?wprov=sfla1|존 콘로이]] 경에게 의지하게 되고, 장차 여왕이 될 [[빅토리아 여왕|빅토리아 공주]]를 압박했다. 결국 빅토리아 공주는 어머니를 싫어하게 되었고, 1837년 왕위에 올랐을 때는 그 갈등이 극에 달해 있었다. 두 사람의 사이가 좋아지기 시작한 것은 [[빅토리아 여왕]]이 1840년 11월 21일에 첫 딸 [[빅토리아 애들레이드 메리 루이자|빅토리아 공주]]를 낳은 이후라고 한다. 한편 [[윌리엄 4세]]와도 관계가 나빴는데, 윌리엄은 마리 루이제 빅토리아가 너무 노골적으로 빅토리아 공주의 후견인을 자처하며 간섭하는 모습을 불편하게 여겼기 때문이다. 게다가 윌리엄 4세와 [[작센마이닝겐의 아델하이트|애들레이드 왕비]]는 빅토리아 공주를 친딸처럼 매우 아꼈는데, 마리 루이제는 빅토리아가 다른 왕족들과 만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윌리엄 4세 부부와도 잘 만나게 하지 않았다. 결국 윌리엄의 생일 만찬 때 이 반감이 폭발해서 윌리엄 4세는 "나는 빅토리아 공주가 성인이 될 때까지 살 테니까 당신들(빅토리아와 존 콘로이)은 [[섭정]] 따위는 꿈도 꾸지 마시오!"라고 일갈했을 지경이었다. 아니나다를까, 실제로 윌리엄 4세는 빅토리아 공주가 법적 성인인 만 18세가 된 지 26일 뒤 사망했다. 1861년 3월 16일 딸 [[빅토리아 여왕]]의 옆에서 눈을 감았다. 여왕은 생전 어머니를 미워하기도 했으나 그녀가 사망한 후 슬퍼했다고 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